질투 많은 애인을 위해
어떤 때는 선배가 더 애 같다니까요.
내가 널 더 많이 좋아하는 거겠지.
‘넌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이것만 걸고 돌아다니면 돼!’
‘부탁이야, 레아! 홍보는 너밖에 없어!’
‘우린 너만 믿고 있다고!’
그것이 문화제 당일 반 친구들이 레아에게 했던 부탁이었다. 테니스부 활동으로 인해 문화제 준비를 도와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 제가 도울 일은 없냐고 물어봤더니 받은 건 부스 홍보용 팻말이 전부였다. 아니, 정확히는 단정하고 정갈한 메이드 복장도 함께였지만 말이다.
특별한 것 없이 이것만 입은 채 팻말을 들고 돌아다녀 달라는 제안을 승낙한 레아는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이거면 되나 싶은 떨떠름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다른 친구들은 카페 준비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저 혼자 너무 한량처럼 노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그 기분을 친구에게 말했더니 고개를 절레 저은 친구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넌 아직 네 홍보 효과를 잘 모른다는 둥 알 수 없는 소리만 늘어놓았다. 믿었던 친구마저 제 등을 쭉쭉 밀며 학교나 한 바퀴 돌고 오라 해, 반을 나서게 된 레아는 제 목에 걸린 팻말을 내려다보았다.
‘1학년 7반 카페에 들러 주세요.’
홍보 욕심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간단한 문구. 그마저도 급했던 건지 아무 펜으로나 대충 슥슥 적어놓은 느낌이 강했다. 과연 이런 거로 홍보가 될까 싶어 미심쩍은 눈을 하다가 옷에 들어간 머리카락을 빼내고 발을 옮긴다. 쉽게 볼 수 없는 복장 때문인 건지 발걸음 하나하나에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평소보다 월등히 많은 시선이었다.
이게 맞는 걸까.
복도를 걷다 보면 저를 돌아보는 사람들이 몇몇 있긴 했지만, 그것이 부스 방문으로 직결될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이럴 거라면 사람이 많은 쪽이 효과가 더 좋을 거라 생각한 레아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운동장을 확인했다. 야외 부스가 많은 덕에 교문이 참관객들로 북적거렸다. 그 모습을 눈에 담은 레아는 망설임 없이 발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운동장을 한 바퀴 돈 다음 다시 반으로 돌아가면 되겠지.
반으로 향하려면 계단을 올라야 했고 긴 복도를 지나야 했으니 홍보할 시간은 충분할 것 같았다. 적당한 계획을 세운 뒤 운동장으로 나가자,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사람들의 시선이 제게 쏠리는 게 느껴졌다. 홍보 차원으로 그들을 잠시 봐주었다가 안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다른 홍보 담당들을 보면 웃으면서 말을 걸기도 하는 것 같은데 제겐 그만한 사교성이 없었다.
애초에 그렇게까지 간절한 편도 아니었고. 그냥 반 아이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을 선까지만 적당히 도와주고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운동장을 절반쯤 돌고 나니 누군가 툭툭 하고 제 어깨를 두드려 왔다. 고개를 돌리자 처음 보는 사람이 시야를 채운다. 무슨 용건이냐는 눈빛을 보내자 사람 좋게 웃은 그가 멋쩍은 듯 볼을 긁더니 1학년 7반이 어느 쪽이냐고 물어왔다. 레아의 얼굴이 티 나지 않게 살짝 밝아졌다.
됐다.
홍보가 성공적으로 된 것 같아 긴장을 푼 레아는 2층 복도 끝을 가리켰다.
“1학년 7반은 저기예요.”
열심히 준비했으니 부스에도 들러 주세요. 홍보 차원으로 덤덤히 덧붙인 말에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긴 상대가 고맙다며 손을 흔들었다. 그가 중앙 현관으로 향한다. 그의 친구들로 보이는 사람들까지 그를 따라 부스로 향했으니 일단 두 명은 확실히 부스 수입에 도움을 줄 것이었다.
한 건 해냈다는 마음으로 안도를 내쉬자 주변에 서성이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레아를 향해 다가왔다. 카페에서 무얼 전문으로 파냐는 말에 과일 주스와 마들렌 위주로 판다고 대답해 주자 고개를 끄덕인 그들이 고맙다고 얘기한 뒤 1학년 층이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다가와 말을 걸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
“하….”
족히 서른은 넘는 사람들을 상대해 지친 숨을 내쉰 레아는 1학년 7반으로 돌아가면서 뻐근한 목을 돌렸다. 사람을 응대하는 게 이리 진이 빠지는 일인 줄은 몰랐다. 그래도 고생한 만큼 어느 정도 홍보가 된 것 같아 지금쯤 손님들로 북적거릴 부스를 상상해본다. 얕은 성취감이 든 순간이었다.
드르륵.
“……!”
돌연 야외 부스라 비어있던 4반의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훅, 뻗어져 나온 팔이 레아를 붙잡았다. 그것이 작은 여인을 교실 안쪽으로 끌어당긴다. 반응도 못할 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를 끌어당기는 힘이 무척이나 강해 저항도 하지 못했던 레아는 도로 닫히는 문을 바라보다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소년이 보인다. 위에서 아래로 저를 마주 보고 있는 그를 확인한 레아가 드물게도 당황한 티를 내며 입을 열었다.
“선배?”
3학년인 그가 어째서 1학년 빈 교실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 의문을 고스란히 담아 그를 부르자, 레아를 품에 안은 료마가 소녀의 어깨 위로 제 턱을 얹었다. 그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답답한 티를 낸다. 갑자기 그에게 붙들리게 된 레아는 영문 모를 표정으로 머리카락만 살짝 보이는 료마를 응시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양 순진하게 눈만 끔뻑대는 연인을 본 료마는 툭, 소녀의 어깨 위로 제 이마를 대었다.
“왜 이제 와.”
투정처럼 얘기하곤 이마를 비비며 나른한 숨을 흘렸다. 정말이지, 초조해서 죽는 줄 알았다.
1학년에 예쁜 여자애가 메이드 복을 입고 돌아다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설마 싶었는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정말로 레아가 메이드 복을 입은 채 부스 홍보를 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본 순간부터 속이 뒤집히고 열이 올라 당장 그만두라 하고 싶었지만, 레아 나름대로 축제를 즐기고 있는 거라 생각해 그냥 위층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랬더니 웬 별별 같잖은 것들이 다 꼬여선.
부스가 어딘지 알고 싶다는 구실로 말을 걸고 레아를 터치하며 주변에 어슬렁거리던 남자애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생각할수록 더 속이 끓어 인상을 쓴 료마는 안정제라도 찾듯 고개를 숙여 제 품에 안겨 있는 소녀의 체취를 맡았다.
잔뜩 눌러 참은 화가 향긋한 체취에 금방 누그러진다. 레아가 이리 얌전히 안겨 있는 걸 보아, 부아가 치민다고 당장 뛰쳐나가지 않고 교실에서 잘 참은 건 옳은 선택인 것 같았다. 만약 제가 참지 않고 홍보 중인 레아를 데려갔다면 그 성격에 필시 화를 냈을 테니.
안도해야 할지 답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한 번 더 한숨을 내쉰 료마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 조금 전 모르는 남자가 두드렸던 레아의 어깨가 들어온다. 불쑥, 불쾌함이 치솟아 미간을 좁힌 채 툭툭, 마른 어깨를 털어냈다.
“선배? 왜 그래요?”
제 속은 까맣게 모를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뒤에서 안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게 답답한 건지 몸을 뒤척이는 그에, 레아가 저를 볼 수 있도록 고개를 어깨 앞쪽으로 묻은 료마가 입을 열었다.
“레아.”
“네.”
평소와도 같은 담백한 대답이 괜히 얄밉게 느껴졌다. 괘씸한 마음이 들어 홱,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턱을 내려 시선을 마주한 레아가 눈을 멀뚱거렸다. 제게 보내는 시선에서 왜요, 하는 의문이 느껴진다. 늘 그런 시선에 지곤 했던 료마는 이번에도 역시 짧은 한숨을 토해내곤 레아의 배 앞으로 손깍지를 꼈다.
“이런 거, 나한테만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니야?”
“네?”
옷에 달린 레이스에 코를 비빈 뒤 얘기하자 레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순진한 눈을 바라보던 료마는 어깨 위로 입을 맞췄다.
“만지는 것도. 나한테만 허락해 줘.”
“……?”
“꼬맹이는 사람 안달 나게 만드는 게 취미인가 봐? 대답도 안 해주는 걸 보면.”
쪽, 하고 어깨 위로 닿았던 입술을 떼어낸 뒤 참았던 불만을 낮은 목소리로 읊조린다. 그에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잠시 눈을 굴린 레아가 료마의 감정을 유추해 내곤 연인의 머리에 제 머리를 기대었다.
“질투했어요?”
“당연하지.”
내가 레아의 것인 것처럼 레아도 내 거잖아.
쓸데없이 뻔뻔하고 당당한 말이 귓불 근처에서 속삭이듯 들려왔다. 불만과 질투, 거기에 장난기가 살짝 더해진 목소리를 들은 레아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손을 올려 머뭇거리다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그가 저를 안은 채로 걸음을 물려 교실 벽에 기대앉는다. 얼결에 그에게 붙잡혀 함께 앉게 된 레아는 거대한 강아지처럼 제 손에 머리를 비벼대며 안정을 취하는 료마를 매만지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반으로 복귀하기에는 시간이 제법 늦었고, 제 뒤에 있는 연인은 저를 놓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반에 가서 옷을 갈아입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질투 많은 애인을 위해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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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결님 (@commission_Tim)